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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김건호 (흥사단 부산지부장, 부산산업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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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동박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9-25 01:43 조회11,490회 댓글0건

본문

 

( 아래 원고는 부산흥사단 홈페이지에 게재된 부산흥사단 김건호 지부장의 한글에 대한 강좌 자료인데, 본인의 동의를 득하고 복사해왔습니다. 김건호 지부장은 부산산업학교 교장으로 재임중입니다  - 차동박 )

 

한글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들어가기]


1. 만원권 지폐, 오만원권 지폐


2.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한 인도네시아 마을 -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주 부퉁섬 바우바우시 - 찌아찌아어를 한글로 표기 - 찌아찌아어 발음을 그대로 표기하기에 한글이 가장 적합하다.

까아나[집], 시골라[학교], 보꾸[책], 마누[닭]

인다우 마아 파에 마이 이사[나는 밥과 물고기를 먹었습니다]


3. 정보화 사회와 한글

가. 인쇄소와 한글 – 과거의 활판 인쇄소, 오늘날의 출판 소프트웨어 사용 인쇄소

나. 휴대전화와 한글 – 한글 문자 입력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휴대 전화.

다. 신문과 한글 – 오늘날 한자를 거의 사용하지 않아도 불편해 하는 국민이 없음


[기본 이해]


1. 한글과 맞춤법

가. 글자는 말을 표기하기 위한 수단[도구]이다.

나. 우리 민족도 우리말을 제대로 표기할 글자를 오랫동안 원했었다.

다. 한자를 빌려 썼지만, 중국말을 빌려 쓰지는 않았다.[인도네시아 바우바우시 사람들도 한국어를 빌어 사용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들은 찌아찌아어를 표기하는 데 한글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일 뿐이다.]

라.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우리말을 제대로 표기할 글자가 필요하다.

마. 우리 맞춤법은 우리말을 바르게 표기하기 위해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하여 채택한 가장 좋은 약속이다. [우리 맞춤법은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한글로 우리말을 가장 올바르게 표기하는 사용법(매뉴얼)이다.]


2. 문화와 말과 글자

가. 문화 -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나. 언어[말]

  하위 문화 중에서 같은 민족이 가장 넓게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문화

다. 문자[글자, 글]

  말을 눈으로 볼 수 있고, 기록할 수 있게 표현하는 일종의 기호 체계[문화]


3. 문제 제기 - 우리에게 한글은 무엇인가

가. 글자는 문화의 소산이자, 문화의 매개체이다.

나. 오늘날 문화는 지배층, 피지배층 등의 구분 없이 국민 모두가 향유하는 것이다. 한글은 이러한 이상을 가장 잘 실현하게 하는 문자이다. 오늘날 세종대왕의 덕을 입지 않은 국민은 없다.[한글로 교육을 받고, 한글로 문화를 향유한다. – 만약 한글이 없었다면?]

다. 과연 우리에게 한글은 무엇인가?

라. 한글 사용법[맞춤법]을 잘 알아야 하고, 잘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고, 제각기 한글로 우리 문화 창달에 기여해야 한다.


4. 생각해 보기

가. 다음 글은 어떤 학생이 한글에 대한 자부심을 적은 것입니다. 이상한 곳을 가리켜 보세요.

한글은 우리나라의 자랑스런 언어로서 세계의 그 어떤 언어와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는 언어로서 다른 언어가 지니지 못한 장점을 한글은 갖추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되어 한글을 소개합니다.

나. 다음 질문에서 이상한 점은 무엇일까요?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 우리 나라 사람은 무슨 말을 썼나요?

다. 말과 글을 구별하지 못해서 생기는 실수입니다. 세종 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은 우리 말을 표기하기 위한 ‘글[글자]’입니다. 우리 민족은 아주 오래 전 한반도에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 우리가 쓰는 말과 비슷한 말을 이용하여 대화를 나누었을 것으로 학자들이 짐작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말을 적을 글자가 없어서 한자(漢字)를 빌려 쓴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은 오래 전부터 우리 ‘말’을 쓰고 있었고 훈민정음 창제 이후부터는 우리말을 제대로 표기하는 우리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글을 지킨 사람들]


“아는 만큼 보인다.”    “아는 만큼 사랑한다.”


1. 조선어학회사건 (朝鮮語學會事件)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 조선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조선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1938년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다. 1941년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의 공포로 독립운동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심증만으로도 잡아갔다. 1942년 함흥의 여학교 학생들이 조선어로 대화하다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취조를 받던 중,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국어사전 편찬을 맡아서 일하던 교사 정태진이 관련되었다는 것이 알려졌고, 이를 빌미로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단체로 몰아 관련자들을 구속하였다. 일제는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단체라는 억지 자백을 받아내고서 당시 조선 최고 지식인들을 검거하는 꼬투리로 삼았다. 그리하여 42년 10월 1일부터 33명을 취조한 뒤,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하여 16명을 기소하였다. 기소된 16명 중 이윤재·한징은 심한 고문과 추위·배고픔으로 옥중에서 사망하고 장지영·정열모는 공소소멸로 석방되어, 12명이 공판에 넘어갔다. 1944년 12월부터 1945년 1월까지 9차에 걸친 재판에서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월, 정인승·정태진 징역 2년, 김법린·이중화·이우식·김양수·김도연·이인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장현식 무죄가 각각 선고되었고, 광복으로 1945년 8월 17일 모두 풀려 나왔다.


2.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년∼1962년)

◇ 중추원 의원이자 종로의 거상으로 알려진 전영기의 2남 4녀 중 막내, 대부호(10만석 부호가)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다.

◇ 1929년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 한국의 문화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들을 사모으다가, 1934년에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하고, 33세 되던 1938년에는 자신의 소장품으로 북단장 안에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세웠다. 이것이 확대되어 1966년에 간송미술관이 된다. 간송미술관은 한국의 국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미술관 중의 하나이다. 국보 11점과 보물 10점을 포함, 수천 점의 문화재를 보관하고 있다.

◇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하였으며 1945년에는 1년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다. 보성중학교 졸업반 학생들을 반드시 보화각에 데리고 와 문화재를 관람시킨 뒤에 졸업시켰다.

◇ 1960년에는 이전부터 그를 돕던 김상기, 김원룡, 최순우, 진홍섭 등과 함께 '고고미술 동인회'를 만들고 《고고미술(考古美術)》이란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 1962년 그의 사후에 문화훈장이 추서되었고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바뀌었으며 북단장에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었다.

◇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던 오세창 선생으로부터 문화재 보는 안목과 지식을 배운다.


◆ 1942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을 구입한 일화가 유명하다.

1942년 늦여름, 자신이 경영하던 한남서림의 창밖을 보던 간송의 눈에 옛 서적 전문 유명한 골동품 상인이 어딘가 바쁘게 가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게 여겨 그를 붙잡고 물어보니, ‘경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는데, 책 주인이 일천 원을 불러서 돈을 구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 찍어낸 훈민정음 원본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었는데, 만약 그것이 발견된다면 조선총독부가 가만 두지 않을 것이 뻔했다. 간송은 거간꾼에게 즉시 일만 일천 원을 건네며 책 주인에게 일 만원을 전하고 일천 원을 수고비로 받으라고 했다.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이었다. 물건 값은 제값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신조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해서 훈민정음(국보 제70호)원본을 간송이 소장하게 되었다.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간송은 훈민정음이 있다는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지 않게 조심했다. 만일 조선총독부가 알게 된다면 훈민정음이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6. 25 사변 때, 전형필은 우리 미술사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품만을 꾸려 부산으로 옮겼다. 그런데 서울 수복 후에 불길한 예감이 들어 부산에 보관 중이던 미술품을 무리를 하면서 서울로 옮겨 놓았다. 그 일이 있은 직후 부산의 보관창고에서 불이나 건물이 모두 불타 버렸다. 실로 엄청난 사건으로, 만약 그의 선견지명이 없었다면 귀중한 문화재가 모두 재로 사라졌을 것이다. 이 때부터 그를 ‘문화재 수호신’이라고 불렀다. 훈민정음만은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낮에는 품고 다니고 밤에는 베개 사이에 끼우고 자면서 잠시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고 한다.   1950년 통과된 농지개혁법으로 간송의 소유이던 농지가 소작인들에게 분배되고, 그 대신 국가로부터 토지 대금으로 지가증권을 받았다. 그런데 6.25 전란을 치르면서 화폐가치가 한정 없이 추락하여, 증권이 휴지로 변하였다.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그는 설상가상으로 보성중고등학교에서 재정적인 사고가 터지자 침몰하고 말았다. 교장의 관리 소흘로 생긴 엄청난 빚은 그에게도 힘에 겨웠지만, 그 빛을 대신 갚아 주면서도, 귀중한 유물들은 결코 팔지 않았다.

◆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국보 68호) - 1935년 간송이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일본인 골동품상에게 무려 2만원의 거금을 주고 구입하였다.

◆ 청화백자양각철채난국초충문병(靑華白磁陽刻鐵彩蘭菊草蟲文甁) - 1936년 11월,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품 경매장인 서울 경성미술구락부경매장에서는 엄청난 가격 경합을 벌이는 경매가 진행됐다.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현장을 지켜봤다. 당시 저축은행(제일은행의 전신)의 일본인 행장이 갖고 있던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靑華白磁鐵砂辰砂菊花文甁·국보 294호)'을 놓고 일본인 골동품상과 전형필이 마지막 순간까지 경합을 벌였다. 일본인 골동품상이 최종으로 1만4550원을 부르자 전형필이 30원을 더해 1만4580원을 불러 낙찰 받았다. 당시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가 1,00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높은 값에 거래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 존 개츠비의 소장품인 고려청자의 구입에 대한 일화도 유명하다.

1937년 2월, 일본 동경에서 고려자기를 수집해 오던 영국인 존 개스비(John Gadsby)가 그의 컬렉션을 처분한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간송은 전세기를 타고 바로 일본으로 향했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충남 공주에 있던 2백석 지기 농장을 팔아야 했는데, 급히 파는 바람에 제 가격을 받지도 못했다. 지금까지 간송의 문화재 수집에 대해 이렇다 말씀이 없었던 그의 어머니조차도 이때만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걱정하셨을 정도라고.

당시 기와집 50채 값인 현금 50만 엔을 아낌없이 지불한 간송, 그의 용기 있는 결단은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였다. 이렇게 사들인 고려청자 10점 중 훗날 2점은 국보로, 2점은 보물로 지정이 되었다.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제 65호), <청자압형수적>(국보 제 74호)

<청자상감포도 동자문매병>(보물 제 286호), <청자상감 모자합>(보물 제 349호)

◆ 간송미술관 - 매년 5월과 10월에 각각 2주씩 소장 문화재를 전시하여, 일반 국민에게 공개하고 있다. 관람료는 받지 않는다.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제 65호), <청자상감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 66호), <청자운학상감문배병>(국보 제 68호), 『훈민정음』(국보 제 70호), 『동국정운』권1,6(국보 제 71호), <금동계미명삼 존불>(국보 제 72호), <금동삼존불감>(국보 제 73호), <청자압형수적>(국보 제 74호), <혜원 풍속도>(국보 제 135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국보 제 149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국보 제 294호) 국보 11점

<백자박산향로>(보물 제 238호), <금보>(보물 제 283호), <금동여래입상>(보물 제 284호), <금동보살입상>(보물 제 285호), <청자상감포도 동자문매병>(보물 제 286호), <분청박지화문병>(보물 제 287호), <분청사기모란문반합>(보물 제 348호), <청자상감 모자합>(보물 제 349호), <괴산 외사리 석조부조>(보물 제 579호), <전 문경오층석탑>(보물 제 580호) 보물 10점


전형필이 없었다면 우리는 많은 위대한 문화 유산들을 지금 만나지 못할 뿐 아니라, 반만년 역사를 감히 자랑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전형필 덕분에 악랄한 일제 치하를 지나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정기가 살아 있는 것이다.


3. 나라를 잃으면 역사를 잃는다.

○ 일제 치하 36년은 우리 문화유산 약탈의 36년이었다.

○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압수한 20만권의 귀한 서적

○ 도쿄 국립박물관의 오쿠라 컬렉션. 각종 도자기와 회화, 불상 등이 진열되어 있다. 오사카 동양 도자 박물관.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고려청자들이 소장되어 있다.[우리 민족을 멸시하고 문화 말살 정책을 폈던 그들이 왜 그들의 대표적인 박물관에 우리의 찬란한 문화 유산을 전시하고 있을까?] ¯  한일 합방 이후, 일본에서 건너온 골동상과 도굴꾼들은 개성을 포함한 전국의 고분을 도굴, 전 국토를 파헤쳤다. 그들에게 협조한 얼빠진 사람들

※ 박제가 북학의 - 중국과 화폐 통일 주장

※ 영어 전용 또는 병용 주장

눈에 밟히는 '몽유도원도'

  7일 밤 10시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이곳에서, 몽유도원도 전시 마지막 날인 이날은 폐장 시간이 원래 밤 9시였지만, 전시는 자정 가까이 돼서야 끝이 났다. 이날 하루 1만4000여명이 몽유도원도를 찾았고, 개막 이후 총 6만1123명이 관람했다.

  조선전기 최고 걸작 그림이 해외로 반출돼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는 안타까움과 짧은 전시 일정, 그리고 '이번 아니면 평생 못 볼지 모른다'는 절박함이 빚어낸 발걸음이었을 것이다.

  9일간의 고국 나들이를 끝낸 그림은 이날 밤 포장돼 8일 오전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앞으로 '몽유도원도'를 국내에서 다시 볼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소장자인 일본 덴리대(天理大) 도서관은 상설 전시도 없고 대여도 거의 하지 않는다. 일반인이 볼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덴리대의 태도는 유감스럽다. 아무리 귀한 유물이라도 수장고 속에 모셔만 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본 왕실의 유물 창고인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은 매년 가을 20일간 엄선한 보물을 전시합니다. 덴리대도 최소 1년에 한 번은 그림을 공개해야 해요." 한 70대 관객은 몽유도원도 앞을 오랫동안 떠나지 못했다.(조선일보 10월 9일 발췌)


4. 한글의 제자 원리

※ 가림토문자

가. 세종실록 - 여기에는 훈민정음 각 자모의 음가, 글자 사용 방법, 정인지가 쓴 서문이 나와 있다. 그러나 제자 원리는 나와 있지 않다.

나. 주해본 훈민정음 - 1446년~1459년 간행 추정. 바로 뒤에 소개할 ‘해례본 훈민정음’을 해설한 책이다. 해례본의 앞머리에 있는 세종대왕 서문과 예의(例義)의 한문 부분만을 번역하여 발행(단행본으로 발행했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훈민정음 언해본’이라고도 한다.  앞의 세종실록에 나온 내용을 해설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거의 같다. 여기에도 제자 원리는 나오지 않는다.

다. 해례본 훈민정음 - 1446년 간행. 국보 제 70호. 유네스코는 1997년 10월『훈민정음』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훈민정음』은 한글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임을 직접 증명해 보여주는 것으로, 기록유산으로 보전할 만한 가치가 충분함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1) ‘제자해’라는 작은 제목 밑에 음양오행의 이치에 맞게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2) 자음 글자 ‘ㄱ, ㄴ, ㅁ, ㅅ, ㅇ’의 모양은 발음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다. 다른 글자들은 획을 더해서 만들었다.

(3) ‘옛이응(ㆁ), ㄹ, 반치음(ㅿ)’은 발음 형상을 본떳지만, 획을 더한 것은 아니다.

(4) 모음 글자 ‘․’는 그 형상이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고, ‘ㅡ’는 그 형상이 평평한 것은 땅을 본뜬 것이며, ‘ㅣ’는 그 형상이 선 모양인 것은 사람을 본뜬 것이다.


5. 한글의 위상

  가. 나라 밖

◆ 외국의 학자들이 우리 한글의 이러한 제자 원리를 알고는 정신이 깜빡 넘어갑니다. 감탄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작 나라 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류가 퍼지기 훨씬 이전부터 이 학자들은 한글과 세종대왕의 영원한 팬이 되었습니다.

“한글은 세계의 알파벳입니다. 한글보다 뛰어난 문자는 없습니다.”


  로버트 램지 미국 메릴랜드대 교수는 6일(현지 시간)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의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한글날 563돌 기념 특별강연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언어학자인 램지 교수는 “한글 발명은 어느 문자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위대한 성취이자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한글은 소리와 글이 체계적인 연계성을 지닌 과학적인 문자”라면서 “한글은 한국의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어느 한 나라를 뛰어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세계의 선물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램지 교수는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15, 16세기의 경상도 함경도 말을 연구했다.

[동아일보, 2009-10-08]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

   교육과학기술부가 주관하는 한국어능력시험, 즉 TOPIK의 올해 응시자는 지난해보다 30% 증가한 19만 명. 시험을 처음 도입한 지난 1997년 응시자가 2700명 정도였으니 90배가 늘어난 셈입니다. 최근에는 한글과 한국어 세계화를 위한 정부와 민간차원의 지원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1일 현재 한국어 보급기관을 `세종학당`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하고 한국어 보급을 확대하는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한국어 세계화를 위해서는 장기적이며 세부적인 전략과 함께,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대학위주, 대도시 위주로 지원해서는 한국어 저변을 확대하는데 한계가 있어요. 일본 같은 경우는 제가 같던 부톤 섬의 바우바우 한 고등학교에 랩실도 지어주고 일본어 교육하는 것을 봤습니다. 우리는 그 정도까지 하질 못하고 있거든요."(동아일보 2009-10-09 발췌)


오늘날 한국어 사용 인구가 약 7000만 명으로 세계 13위를 차지하고 있고, 아시아권 내 한국과 한국어의 위상이 국제 언어로서 손색이 없다.

◆ 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치시, 온천과 농업 외에는 내세울 만한 변변한 산업도 없는 이 도시는 해외 관광객 유치에 시의 사활을 걸었다. 그리하여 거리에 한국어와 중국어로 된 안내판이 내걸렸다. 한국인이 있는 곳에는 한글이 있다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일본 소니가 한국어를 쉽게 해석할 수 있는 전자사전을 출시했다고 한다. 일본 대기업이 한류 열풍을 겨냥하여 사업 성공의 열쇠로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한글 및 한국어'였다.

 일본 인터넷에서는 한류 열풍의 영향으로 '가나다라송'이란 이름으로, 우스꽝스러운 아저씨가 춤을 추며 한글을 가르친다.

  나. 나라 안

◆ 국산 밀폐용기 '락앤락'이 전 세계 플라스틱 주방용기 시장을 석권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국내 소비자들은 지금껏 이 제품이 외제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제품에 한글 표기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이 회사 관계자들은 “회사 입장에서는 글로벌 판매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제품 겉 표기를 바꾸면 추가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국내 판매량에 대해서만 표기를 한글로 고칠 계획은 없다.”고 한다.

◆ 일부 수입업체가 중국산 마스크를 팔면서 여기에 사용 설명서와 국내 수입 업체명 및 주소를 모두 한글로 표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소비자가 이 제품을 국산 제품으로 오인하도록 조장하므로 문제가 된다고 지적을 받았다.

두 기사에서 소비자들은 제품의 겉포장에서 한글을 확인함으로써 곧 한국 제품이라 생각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글에 대한 시각은 서로 판이하게 다르다.

최근 중국 정부 공안국과 공상국은 북경에서 '한글 간판'을 집중 단속하여 철거하기로 했다고 한다. 중국어와 한글이 병기되어 있지 않은 간판, 즉 중국어 설명이 없는 외국어 간판은 중국 현행법상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유야 어쨌든, 이것은 위의 사례들과 대조적이다. 중국에서는 정부가 나서서 자국어와 자국 문자를 보호하고 장려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한글이 천대받는 현실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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