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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엑스몰 278개 간판 다 확인해봤습니다…한글은 63개뿐

송고시간2023-10-0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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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줄 요약

577돌 한글날을 나흘 앞둔 5일 서울 강남구 스타필드 코엑스몰.

외국어로 된 상점 간판이 여기저기 내걸린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정도가 갈수록 심해져 이제는 좀 과도한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영어를 크게 내건 채 한쪽 귀퉁이에만 한글 상호를 작게 써둔 간판이 29개였고, 한글로만 표기된 간판은 63개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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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국 맞나" 식당 메뉴판도 '외국어만 표기' 부지기수

"외국어 모르는 다양한 세대 있는데 차별의 문제" 지적도

대형 쇼핑몰의 로마자 상호 간판
대형 쇼핑몰의 로마자 상호 간판

[촬영 이미령, 이율립]

(서울=연합뉴스) 이미령 이율립 기자 = "간판을 못 읽으니까 뭔지는 모르고 일단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사서 나오는 거죠."

577돌 한글날을 나흘 앞둔 5일 서울 강남구 스타필드 코엑스몰. 한 의류 매장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내부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박모(86)씨는 "간판이 전부 영어라 (알아보기가) 너무 어렵다"며 이렇게 푸념했다.

외국어로 된 상점 간판이 여기저기 내걸린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정도가 갈수록 심해져 이제는 좀 과도한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특히 외국인이 많이 찾는 상점가 간판은 상당수가 외국 문자로 돼 있어 영어를 비롯해 외국어에 익숙지 않은 이들은 곤욕을 치르기 일쑤다. 한국인이 한국에서 간판을 못 읽어 길을 못 찾는 웃지 못할 상황마저 벌어진다.

◇ 코엑스몰 지하 1층 278개 간판 다 읽어보니…외국어로만 된 간판 177개

실제 코엑스몰 지하 1층 매장 278곳을 전부 둘러보며 간판을 확인해봤더니 외국어로만 표기된 매장 간판은 177개나 됐다. 매장 5곳 중 3곳 이상이 한글 병기조차 없는 외국어 간판을 걸어놓은 셈이다.

영어를 크게 내건 채 한쪽 귀퉁이에만 한글 상호를 작게 써둔 간판이 29개였고, 한글로만 표기된 간판은 63개뿐이었다. 나머지는 알파벳이나 한자가 한글과 비슷한 크기로 섞여 있거나 로고만 있는 간판이었다.

이곳에서 청소 업무를 하는 이모(68)씨는 "간판이 전부 영어로 돼 있어서 나이가 많은 분들은 새로 오면 적응하는 데만도 몇 달이 걸린다"며 "특히 옛날에 학교를 나온 동료들은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딸과 함께 지도를 보며 길을 찾던 박정임(54)씨는 "(간판이) 영어로 쓰여서 헷갈릴 때가 많다. 젊은 층이야 괜찮겠지만 중년층 이상은 모르는 경우도 많다"며 "간판에 한글도 같이 써놓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모(78)씨는 "요즘엔 다른 곳들도 간판들이 너무 영어 일색이라 참 못마땅하다. 크게 불편함은 없지만 우리 것도 유지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혀를 찼다.

특히 요즘에는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 같은 외국어로 간판을 걸어둔 가게도 많다.

서울 노원구에 사는 성모(58)씨는 미용실에서 자녀를 만나려다 프랑스어 간판을 알아보지 못해 결국 간판 사진을 받아 겨우 찾아갔다. 성씨는 "지금도 그 미용실 이름도 못 읽고 뜻도 모른다"며 "특히 의류나 미용 관련 상표에 프랑스어를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 같아 종종 불편하다"고 말했다.

간판 읽기가 어렵기는 젊은층도 마찬가지다.

신용산역부터 삼각지역까지를 칭하는 '용리단길'을 자주 찾는다는 최모(30)씨는 "요즘 새로 생긴 가게들이 일본어 간판을 거는 것을 종종 봤다"며 "무엇을 파는지 도저히 알 수 없어서 포털에 검색해보곤 한다"고 말했다.

이어 "굳이 간판에 외국어를 써야 하나 싶다"고 덧붙였다.

매장 안에 들어가도 '읽기 시험'은 끝나지 않는다.

메뉴 자체를 외국어로만 표기해둔 식당이나 카페가 적지 않고 한글로 써놨더라도 영어 발음 그대로 옮겨놓은 경우가 부지기수다. '프레시 치킨 윙즈', '까르니타스 프라이즈', '피치플레저'처럼 적혀있고 따로 설명도 없어서 어떤 음식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60대 직장인 이모씨도 "번역해서 메뉴판에 적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한국 식당인데 죄다 눈 비비고 자세히 봐야 하니 거부감이 든다"며 "자식들이랑 가면 아예 메뉴 선정을 맡겨 버리는 편"이라고 말했다.

성씨는 "메뉴 이름은 물론이고 설명까지 영어로 적혀있는 통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자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문을 한 적도 있다"고 불평했다.

영어로 표기된 식당 메뉴판과 벽 안내문
영어로 표기된 식당 메뉴판과 벽 안내문

[촬영 이미령, 이율립]

◇ 고령층 위한 '간판 읽기' 수업도…법 규정은 있지만 강제는 어려워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령층을 위한 '영어 간판 읽기' 수업도 등장했다.

경기 고양의 한 시니어 도서관은 작년 5월부터 최근까지 어르신 30여명을 대상으로 알파벳을 공부하고 직접 거리로 나가 영어 간판을 함께 읽어보는 수업을 진행했다.

이 도서관 관계자는 "요새는 영어 공부를 한 나도 뭔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라면서 "김밥집을 갔더니 '키오스크'가 뭔지 몰라 주문을 못하는 어르신들을 보고 수업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수업에 참여하는 어르신 중에는 매장에 커피가 보이니까 '커피 파는 곳이구나' 하거나 익숙한 로고만 보고 들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더라"라고 전했다.

유튜브에도 영어가 낯선 이들을 상대로 영어 간판 읽는 법을 가르쳐주는 영상이 적지 않게 올라오고 있다.

간판과 관련해서는 법 규정이 없지는 않다. 현행 옥외광고물법 시행령 제12조2항은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맞춤법, 국어의 로마자표기법 및 외래어표기법 등에 맞춰 한글로 표시해야 하며 외국문자로 표시할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병기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실제 서울중앙지법은 2004년 한글학회와 국어문화운동 등이 "광고전략으로 영어만 사용해 국어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정신적 피해를 끼쳤다"며 KB*b(국민은행)·KT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이들 회사가 옥외광고물법 시행령상 한글 병기 조항을 위반한 사실을 인정했다.

당시 재판부는 "국가간 장벽이 무너지는 현대사회에서 모국어의 중요성만 강조하는 것은 국제관계 고립을 초래하는 편협한 태도이지만 공동체의 공용어를 지키는 노력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옥외광고물에 한글을 병기하도록 한 법규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거나 실질적 효력이 없는 훈시규정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정신적 피해를 배상할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10월 9일 한글날 (PG)
10월 9일 한글날 (PG)

[홍소영 제작] 일러스트

그러나 처벌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고 간판 제작의 자율성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문제라 옥외광고물 한글 표시 및 한글 병기 규정이 실효성을 갖추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서현정 세종국어문화원 책임연구원은 "외국어 공부를 하지 않은 다양한 세대가 있는데 간판이 영어나 이해가 안 가는 한글로 적혀 있어 누구는 아예 무엇인지 인지를 못 한다는 것은 차별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서 연구원은 "간판은 지자체별로 실태 조사도 하고 개선을 위한 움직임이 없지 않지만 벌금 등 규정이 없다 보니 (법 조항이 있더라도) 실효성 문제가 있다"며 "다만 상호의 경우 현실적으로 강제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는 만큼 좋은 한글 간판 사례를 발굴하고 자발적으로 개선하도록 분위기를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already@yna.co.kr, 2yulri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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